데이비드 호킨스『의식수준을 넘어서』 슬픔: 후회, 낙담

2022. 9. 27. 04:18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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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슬픔(후회/낙담, 측정수준 75)

 

슬픔, 이것은 비애,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기간동안 슬픔을 경험하지만 이 수준에 머물러있는 이들은 지속적인 후회와 우울의 삶을 산다. 이것은 한탄, 애도, 과거에 대한 후회의 수준이다.

이것은 또한 습관적 패배자들의 수준이며 실패를 생활양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상습적 노름꾼들의 수준인데, 이러한 삶은 돈과 건강은 물론 직업, 친구, 가족, 기회의 상실로 귀착되는 일이 많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사방에서 비애를 본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비애, 세상의 상태에 대한 비애, 심지어 삶 자체에 대한 비애도 있다. 마치 슬픔이 삶에 치르는 값인 것 같다. 이 수준은 존재에 대한 시각 전체를 물들인다. 그래서 이와 같은 감정적 상실은 심각한 우울증이나 심지어 죽음조차 유발할 수 있다.

 

슬픔은 인생의 무덤이지만, 그래도 이것을 무감정에 비하면 많은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무감정환자들이 울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이 좋아지리라는 것을 안다. 일단 울기 시작하면, 그들은 다시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상적 측면

슬픔은 바라보거나 겪어내기 어려운 보편적 인간경험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공통성과 감정성때문이다. 정도가 약할 때 슬픔은 후회로 표현될 수 있지만, 정도가 심할 때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압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슬픔이라는 경험의 보편성은 에고의 구조 및 본성으로 인한 것인데, 에고는 행복의 근원을 외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으로 잘못 지각하고, 그것을 특별함으로 물들인다. 실제로 행복의 유일한 근원은 내면에 있으며, 행복의 매커니즘은 심령 내적이고 내적이다. 욕망하는 대상, 상황, 관계를 손에 넣을 때 내적인 매커니즘이 그러한 욕구충족과 함께 작동하는데, 왜냐하면 욕망하는 대상, 사람, 조건은 특별한 성질로 물들여졌기 때문이다. 가치는 보는 자의 눈 속에, 혹은 지각된 것에 있지 욕망의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소유권은 물론 욕망과 연결된다.

 

 

영적지향

큰 상실을 겪은 이들이 도움과 답을 구해 결국 종교와 영성으로 돌아서는 일이 적지 않다. 사람들은 공감에서 우러나온 지지, 기도, 종교적 수행에의 복귀에서 감정적으로 위안을 찾아낸다. 따라서 영적원리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강화된 의도에 대해, 상실은 하나의 기회가 된다.

 

상실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건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혼란을 일으키고 감정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상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예기치않게 일어났을 때, 통제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분노와 분개가 솟구친다. 예기치않은 것으로 인한 삶의 붕괴는 또한 강요받은 재적응에 대한 불안을 창조하며, 이것은 중대한 결단을 요구할 수 있다.

영적연구는 모든 괴로움과 감정상의 고통이 저항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두는 게 좋다. 치유는 내맡김과 수용을 매개로 하며, 이러한 것이 고통을 덜어준다.

 

슬픔이나 상실은 스트레스를 주는 삶의 그 어떤 상황과도 마찬가지로 귀중한 성장기회이자 가치와 목표를 재평가하기 위한 시간으로 비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것이 뒤따른다면, 신념체계를 포함하는 모든 집착을 놓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행복의 근원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슬픔(또는 욕망)의 해체

슬픔은 개인적 속성, 예컨데 젊음, 체력, 건강과 같은 것들의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상실과 관련되고 심지어 잃어버린 기회와 관련되는 것은 물론 헛된 추구, 과거의 실패, 불운한 선택에 대한 후회와 관련되기도 한다. 과거의 오류나 오판에 대한 슬픔은 '인간으로 존재함'이라는 학습과정 일부로의 재맥락화를 통해 해결된다.

 

후회는 또한 가설적인 것, 예를 들면 "나는 이러저러하게 해야만 했어." "나는 이러저러하게 할 수 있었어." 혹은 "내가 다르게 선택했더라면..." 등에 실재성을 부여한 귀결이기도 하다. 이런 말들에는 또한 가설적으로 '더 나은' 결정이 이익이나 더욱 큰 행복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환상이 들어있다.

 

이러한 가정은 또한 진화는 학습 곡선상에 있으며 선택에 대한 미지의 카르마적 영향력에는 긍정적인 것은 물론 부정적인 것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있다. "나는 이러저러하게 할 수 있었어."라거나 "이러저러하게 해야만 했어."라는 명제에는 고유한 착오가 있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사람이 정말로 "할 수 있었"다면, 모든 조건이 더 나은 선택에 유리할 경우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정도의 슬픔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다.

하지만 만성적 슬픔은

그것을 밑바탕에 깔려있는 장기적 태도나

의식의 우세한 상태로서의 이원적 위치성의 포기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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